황매산은 봄 철쭉으로 더 알려진 산이지만, 저는 억새를 보러 10월 중순에 갔습니다. 합천군 가회면·대병면과 산청군 차황면 사이에 걸쳐 있는 해발 1,113m의 산인데, 1983년에 군립공원으로 지정된 뒤로 정상 아래 넓은 구릉지가 봄에는 철쭉, 가을에는 억새로 뒤덮이는 곳입니다. 무엇보다 해발 850m 안팎의 정상주차장까지 차가 올라간다는 말에 마음이 놓였습니다. 남은 표고차가 260m 남짓이면 혼자 느긋하게 걸어도 되겠다 싶었습니다.
정상주차장에서 출발
평일 아침 아홉 시쯤 정상주차장에 닿았습니다. 소형차 주차비는 비수기 4천 원, 성수기 5천 원이라고 안내되어 있었고 입장료는 따로 없었습니다. 차 문을 여니 바람이 먼저 들어왔습니다. 해발 850m라 아래 동네보다 확실히 서늘해서 얇은 바람막이를 꺼내 입었습니다. 주차장에서 곧장 억새밭으로 이어지는 돌길이 시작되는데, 오르막이랄 것도 없는 완만한 길이라 몸을 푸는 셈치고 천천히 걸었습니다.
이 구릉지가 황매평전입니다. 해발 800~900m 사이에 펼쳐진 완만한 땅인데, 1980년대에 목장을 만들었던 자리라고 합니다. 소들이 풀을 뜯어 먹고 남긴 것이 철쭉이었고, 그 사이를 억새가 채웠다는 이야기를 표지판에서 읽었습니다. 억새 군락은 65헥타르 안팎이라는데, 숫자보다도 눈앞에서 끝이 안 보이는 은빛 물결이 먼저 와 닿았습니다.
억새 평전 위 첫 전망대
평전을 가로질러 20분쯤 오르니 바위가 불거진 자리가 나왔습니다. 여기서 처음으로 숨이 찼습니다. 돌길이 계단으로 바뀌면서 한 칸 한 칸이 높아졌고, 바람막이 안이 금세 축축해졌습니다. 바위에 올라서니 골짜기 아래로 저수지 물빛이 내려다보였습니다. 기암 사이로 물이 보이는 구도가 좋아서 한참을 서 있었습니다.
여기서부터 정상까지는 능선을 타고 오릅니다. 평일인데도 앞뒤로 사람이 꾸준히 있었습니다. 억새 철이라 그런지 등산복보다 가벼운 차림이 더 많았고, 저처럼 혼자 온 분들도 꽤 보였습니다. 능선에 서면 바람이 세져서 모자를 손으로 눌러가며 걸었습니다.
정상, 1,113m
주차장을 떠난 지 한 시간 남짓 만에 정상석 앞에 섰습니다. 표고차가 크지 않으니 힘든 산행은 아니었는데, 바람 때문에 체감으로는 더 높은 산에 올라온 기분이었습니다. 정상에서는 사방으로 산자락이 겹겹이 물러나고, 그 사이사이로 물빛이 반짝였습니다. 맑은 날에는 멀리 큰 산들까지 보인다고들 하는데, 이날은 산줄기가 겹겹이 트여 보이는 것만으로 충분했습니다. 바위 뒤에 바람을 피해 앉아 보온병 커피를 마시며 20분을 보냈습니다.
황매산이라는 이름에는 무학대사의 어머니가 이 산에서 기도를 드렸고, 그 뒤로 뱀과 칡과 가시가 없는 '삼무의 산'이 되었다는 전설이 얽혀 있다고 합니다. 실제로 억새 사이로 난 길에 가시덤불이 없어 걷기가 편했던 것은 사실입니다.
삼봉 바위 능선으로
정상에서 바로 내려가기가 아쉬워 북쪽 능선을 따라 삼봉 쪽으로 더 걸었습니다. 정상 너머로 상봉과 중봉이 이어지는데 높이가 1,100m 안팎으로 정상과 거의 차이가 없어서, 오르내림보다는 억새를 헤치고 능선을 따라가는 길에 가깝습니다. 양옆으로 억새가 허리 높이까지 올라와 있어 길이 좁게 느껴졌고, 바람이 불 때마다 억새가 한쪽으로 눕는 소리가 났습니다.
삼봉은 이름 그대로 바위 봉우리 세 개가 나란히 선 자리입니다. 억새가 끝나고 바위가 시작되는 지점에 소나무 한 그루가 바위 틈에 뿌리를 박고 서 있었습니다. 흙이라고는 거의 없어 보이는 자리인데 가지가 바람 방향으로 휘어 있는 것이, 이 능선의 바람을 몸으로 보여주는 것 같았습니다.
바위 위는 바람이 더 셌습니다. 능선 옆 억새가 한꺼번에 흔들리는 장면을 찍고 싶어서 셔터를 여러 번 눌렀는데, 바람이 잠깐 잦아드는 순간을 기다리는 쪽이 오히려 어려웠습니다. 카메라를 든 손이 시려서 장갑을 꺼냈습니다. 10월 중순이라도 이 높이에서는 손끝이 먼저 계절을 알아차립니다.
삼봉 끝 바위에 서면 능선 너머로 산줄기가 겹겹이 물러납니다. 바위 능선을 따라 눈을 옮기면 산 하나가 끝나는 자리에 다음 산이 시작되는 식으로 이어져서, 지도 없이는 어느 산인지 가늠하기 어려웠습니다. 이름을 맞추는 대신 그냥 오래 바라보기로 했습니다. 여기가 이날 산행의 반환점이었습니다.
데크길로 하산
왔던 능선을 되짚어 정상을 지나 평전으로 내려왔습니다. 올라올 때는 돌길을 탔지만 내려올 때는 억새밭 사이로 놓인 데크길을 골랐습니다. 경사가 거의 없어 무릎이 편했고, 억새가 데크 높이까지 올라와 있어 은빛 물결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기분이었습니다. 내려오는 길에는 오전보다 사람이 훨씬 많아져서, 이 산은 아침 일찍 오르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정상주차장에서 정상을 거쳐 삼봉까지 다녀온 거리는 약 5km, 사진을 찍고 앉아 쉰 시간을 다 합쳐 세 시간 남짓 걸렸습니다. 표고차가 작아 산행이라기보다 높은 곳에서의 긴 산책에 가까웠는데, 그래서 더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습니다. 억새는 해마다 10월 중순이 절정이고 그즈음 억새축제도 열리니, 붐비는 것이 싫다면 축제 직전 평일 아침을 노리는 편이 좋겠습니다.
코스: 정상주차장 → 황매평전 억새군락 → 황매산 정상(1,113m) → 삼봉 → 정상 → 데크길 → 정상주차장, 약 5km · 3시간 안팎(휴식 포함)
난이도: 하 (표고차 260m 남짓, 삼봉 바위 구간만 주의)
주차: 정상주차장(해발 약 850m, 합천군 가회면), 소형 비수기 4천 원·성수기 5천 원, 입장료 없음
추천 시기: 10월 중순 억새 절정기 (5월 초·중순은 철쭉)
준비물: 바람막이, 장갑, 모자, 보온병, 억새밭은 그늘이 없으니 물 넉넉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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