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하순, 남쪽 끝까지 내려가 보기로 했습니다. 고흥 팔영산은 해발 608m 안팎으로 높지는 않지만, 여덟 개의 암봉을 차례로 넘는 동안 발아래로 다도해가 펼쳐진다는 이야기를 오래전부터 들어 왔습니다. 1998년 전남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가 2011년 다도해해상국립공원 팔영산지구로 편입된, 해상국립공원 안에 들어 있는 보기 드문 산이기도 합니다. 중국 위왕이 세숫대야 물에 비친 여덟 봉우리의 그림자를 보고 이 산을 찾게 했다는 전설에서 그림자 영(影) 자가 붙었다고 합니다. 단풍은 거의 지고 공기는 맑아진 늦가을이 암릉 조망에는 오히려 좋겠다 싶어 날을 잡았습니다.
능가사 주차장에서 흔들바위까지
새벽에 출발해 아침 8시가 조금 넘어 능가사 앞 팔영산탐방지원센터 주차장에 차를 댔습니다. 기온은 5도 안팎, 바람은 없고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파랬습니다. 절 마당을 지나 계곡을 따라 완만하게 오르다가 흔들바위를 지나면서부터 길이 본격적으로 가팔라졌습니다. 1봉까지는 숲길 오르막이 꾸준히 이어져서 중간에 재킷을 벗고 땀을 닦으며 올랐습니다. 숨이 차오를 즈음 나무 사이로 바위 봉우리가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1봉 유영봉, 첫 조망
유영봉(491m)에 올라서자 시야가 한꺼번에 열렸습니다. 한쪽으로는 고흥의 들판이 넓게 펼쳐지고, 반대쪽으로는 바다 위로 섬들이 떠 있었습니다. 봉우리는 날렵하게 솟아 있고, 먼저 와 있던 분들이 바위 끝까지 걸어 나가 한참을 내려다보고 있었습니다. 하늘에는 비행기 구름이 길게 그어져 있었습니다.
철계단과 쇠사다리의 연속
2봉 성주봉(538m)부터는 발보다 손을 더 많이 썼습니다. 바위 사이로 철계단과 쇠사다리가 거의 수직으로 걸려 있고, 난간과 손잡이가 곳곳에 박혀 있어 위험하지는 않지만 고도감은 상당했습니다. 장갑을 끼길 잘했다고 몇 번이나 생각했습니다. 3봉 생황봉(564m)을 넘을 때는 앞사람이 사다리를 다 오를 때까지 아래에서 기다리며 숨을 골랐습니다.
사자봉과 오로봉, 다도해를 내려다보며
4봉 사자봉(578m)과 5봉 오로봉(579m)은 높이가 거의 같아서 능선을 걷는 느낌으로 넘었습니다. 봉우리마다 이름을 새긴 표지석이 서 있어 하나씩 확인하는 재미가 있었습니다. 오로봉 바위에 앉아 남쪽을 보니 바다 위로 섬들이 겹겹이 떠 있었습니다. 늦가을의 맑은 공기 덕에 먼 섬의 윤곽까지 또렷했습니다. 여기서 20분을 앉아 있었습니다.
두류봉, 가장 가파른 구간
6봉 두류봉(596m)이 이 산의 하이라이트였습니다. 거의 수직에 가까운 바위를 쇠난간을 잡고 올라야 하는데, 아래에서 올려다보면 어떻게 저길 오르나 싶다가도 발 디딜 곳이 다 마련되어 있어 한 걸음씩 오르면 어느새 위에 서 있습니다. 우회로가 있으니 높은 곳이 불편한 분은 피해 갈 수 있습니다. 두류봉 위에서 뒤돌아보니 지나온 봉우리들이 연이어 솟아 있어 뿌듯했습니다.
칠성봉·적취봉, 그리고 깃대봉
7봉 칠성봉(598m)은 여덟 봉우리 중 가장 높은 곳입니다. 8봉 적취봉(591m)까지 넘고 나면 암릉은 끝이고, 정상 깃대봉(608m)까지는 순한 흙길이라 긴장이 풀렸습니다. 깃대봉 정상석 앞에서 점심을 먹었습니다. 아침에 출발해 네 시간 가까이 걸렸습니다. 산자락 골짜기에는 아직 단풍이 남아 있었고, 오후 햇살이 낮게 들어오면서 바위들이 실루엣으로 바뀌어 갔습니다.
탑재로 하산
하산은 깃대봉에서 탑재로 내려서서 능가사로 돌아오는 길을 택했습니다. 암릉이 끝나고 낙엽 쌓인 숲길이 이어져 무릎에 부담이 적었습니다. 내려오는 길에 아침에 지나친 능가사 대웅전을 다시 들러 봤습니다. 1644년에 중창된 절로, 대웅전과 동종이 보물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전체 거리는 자료마다 6~8km로 다르지만 제 시계로는 쉬는 시간 포함 다섯 시간 가까이 걸렸습니다. 여덟 봉우리를 하나씩 넘으며 바다를 내려다보는 산, 600m급 산에서 이만한 밀도의 산행은 흔치 않다는 게 한 줄 소감입니다.
코스: 능가사 주차장(팔영산탐방지원센터) → 흔들바위 → 1봉 유영봉 → 8봉 적취봉 → 깃대봉 → 탑재 → 능가사, 약 7km 안팎·4~5시간
난이도: 중상(철계단·쇠사다리 구간 다수, 어려운 곳은 우회로 있음)
주차: 팔영산탐방지원센터 주차장(요금은 현장 확인)
추천 시기: 늦가을~초봄 맑은 날(조망), 봄
준비물: 장갑, 등산화, 물 1L 이상, 스틱은 암릉 구간에서 접어 배낭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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